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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들
2015-09-21 16:37:53
kch2006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
제 글이 마음에 들지 않고 유치하게 느껴졌다면 좀 더 어른스런 방법으로 지적해주고 조언해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온라인상의 교제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기독교 특유의 특성으로 자리 잡은 오만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는 그런 종류의 폭력이 난무합니다.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오만이 다른 이들을 향한 판단과 정죄로 이어집니다. 분명 그 사람의 생각은 무언가 옳은 것을 위해 자신이 일조를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개혁을 위해 혹은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칼로 찌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것이 치명적인 폭력이라는 것을 당사자는 여간해서는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경건의 폭력'이라고 표현한 어떤 분의 글을 읽고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목사와 장로들의 빠진 횟수와 날짜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을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신자들의 목록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습니다.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안티'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몸짓에는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배어있습니다.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습니다. 그분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분류되어 버리고 맙니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트립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 오래 된 전통입니다. 너무도 경건이 몸에 배어 스스로 자신들을 구별된 존재라고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울타리 율법까지 만들어 놓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음식에 집어넣는 양념까지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의 일상화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과시'의 일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과 경건이 종교의 광기로 치달았습니다. 그래서 수틀리면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맛있는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 속에는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경건의 폭력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39일 동안 무사히 금식을 마친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에게서 그들의 엄격한 경건과 돈독한 신앙이 오히려 형제를 짓밟고 자신들의 영성마저 망가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다른 이들을 욕하고 질타하면서 그보다 더 큰 사랑의 계명을 어기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오늘 우리의 모습 속에서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仁) 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사람은 얼마든지 잘못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아니 '잘못할 수 있음'이야말로 인간의 인간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욕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어리석은 범부(凡夫)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긍휼하게 여기고 잘못했을 때에는 그 잘못을 꾸짖고 정죄하기보다는 잘못을 깨닫고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내하면서 기다려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경건은 겸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경건과 믿음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와 거부가 될 것이며 무엇보다 폭력이 되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끔찍한 범죄가 될 것입니다.
누구의 이야기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자아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도록 부추기는 이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잘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프란체스코의 금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하겠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프란체스코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섬에 들어가 금식하기로 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빵 두 덩이를 가지고 섬으로 건너갔습니다. 사순절 기간이 끝나 다시 배를 타고 갔을 때 프란체스코는 한 덩이 반을 들고 있었습니다.
교만해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부족함을 잊지 않기 위해 금식 기간 동안 빵 반쪽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가 허기를 참지 못해 빵 반쪽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가 허문 것은 자신의 완벽함이었습니다. 언제라도 잘못 할 수 있는 인간임을 잊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인격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때로 종교에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떠실는지요? 프란체스코의 빵 반쪽을 기억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자신의 완벽함을 버리고, 다른 이의 영혼을 상하게 할 수 있는 경건의 폭력을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들의 교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타인에 대한 마음의 여백' 이 기독인 됨의 절대적 필요조건 이라는 사실이네요. 기독교 윤리의 본질이 자신에게는 관대하며 타인에게 엄격한 것이라 할 수 없겠죠.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윤리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타인에게는 관대한 것 아닐까요?
2015-10-14
SIJ
[한겨레]철학자 김형석 교수가 본 예수
그는 목사도 아니고 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그는 철학자이다. 평생을 철학교수로 살았다. 지난 9월 그는 96살의 나이에 <예수>를 썼다. 그가 쓴 <예수>는 1만권 이상 팔렸다. “예수가 누군가를 묻고, 그 예수와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진지하게 모색하고 경건히 탐구하는 데 작은 도움이 된다면 그 이상의 고마움이 없겠다”고 서문에서 겸손하게 책을 쓴 이유를 밝혔다.
그가 예수를 안 것은 중학교 1학년, 14살 때였다. 건강이 나빠 삶의 한계를 느꼈다고 한다. 그 겨울 그는 예수를 만났다. “내가 찾은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었고, 영혼의 친구로서의 예수였다”고 한다. 그는 고백한다. “예수를 안 뒤 지난 80년 동안 하루도 하나님과 예수는 내 생활에서 떠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예수를 잊거나 떠난 때가 있어도 예수는 항상 내 곁에 있었다. 나는 가까이 있기 때문에 모르는 점이 많았던 예수를 지난여름 다시 한번 찾아보기로 했다. 예수를 내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알려주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 주제는 과연 인간 예수가 우리의 신앙적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1. 김형석 명예교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김 교수가 모교인 연세대 뒷길을 걷고 있다.
↑ 1. 김형석 명예교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말한다. 김 교수가 모교인 연세대 뒷길을 걷고 있다.
목사도 아니고 신학 전공도 안한
나이 96살, 평생 평신도
건강 나빠 삶의 한계 느꼈던 14살
독서를 통해 예수를 알고
그의 가치관, 기독교 정신 체화
목사의 설교로 예수 알았다면
이미 기독교를 포기했을 것
그들은 기독교 지식에만 매달려
큰 교회가 성공이라는 생각에
참된 기독교 정신 버려
교회만 가면 천당 간다는 건 죄악
김수환 추기경 말처럼
교회는 사회 위해 있는 것이지
사회가 교회 위해 있는 것 아니다
지금도 하루 2번 강연, 원고지 40장 써
그가 말하는 ‘친구’는 그와 동시대를 살아온 이 땅의 지성인들이었다.
백살을 그리 멀리 남겨놓지 않은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사진)는 놀라우리만큼 건강하다. 1970년대 중반 그가 쓴 에세이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는 60만 독자가 읽었다. 허무와 죽음, 고독과 절망, 좌절감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절망을 극복하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그의 철학적 수필집은 당시 초베스트셀러였다.
그는 지금도 하루 두 차례의 강연을 하고, 원고지 40장 이상의 글을 쓴다. 대장 내시경은 평생 한 번도 한 적이 없고, 위 내시경은 20년 전에 딱 한 번 해봤다. 물론 평생 술과 담배를 멀리했다. 어릴 때 그는 건강의 열등생이었다. 중년까지는 친구들과 비슷했다. 그럼에도 그는 젊은 시절 못지않은 정열과 건강으로 노년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의 건강 ‘비결’을 우선 물어보고 싶었으나, 참았다. 우선 그에게 <예수>를 쓴 이유를 물었다.
2. 김형석 명예교수는 <예수>를 쓴 이유는 인간 예수임을 밝히고, 그가 그리스도임을 주변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2. 김형석 명예교수는 <예수>를 쓴 이유는 인간 예수임을 밝히고, 그가 그리스도임을 주변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한국 교회 비정상적 모습 걱정
“나는 독서를 통해 예수를 알았지, 결코 목사들의 설교를 통해 안 것이 아니다. 만약 설교를 통해 기독교 신앙에 접근했다면, 이미 기독교를 포기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통해 예수를 알고, 예수의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기독교 정신을 체화했다. 목사들은 예수의 인생과 가치를 알려주기보다는 기독교 지식을 전달하려고 애쓴다. 지식은 새로운 지식이 들어오면 교체된다. 또 참된 신앙에 들어가는 데는 열쇠가 필요하다. 그 열쇠는 바로 예수이다. 예수와 나의 관계를 알지 않고는 기독교 주변에만 서성이게 된다. 많은 교인들이 ‘나 교회 다닌다’며 만족한다. 교회에 가서 헌금을 많이 하면 높은 직분도 준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를 만났나?’ 물으면 ‘아직 못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는 인간 예수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책임을 감당한 인간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는 이어서 한국 교회의 비정상적인 ‘교회주의’를 걱정했다. “오늘날 교회는 사랑의 봉사보다는 소유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좀더 큰 교회, 좀더 많은 신도를 자랑한다. 유럽의 수백년 걸려 지은 큰 성당은 건축미와 예술성은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성당의 건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굶주림을 견뎌야 했고, 고귀한 생명과 인권이 유린당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는 예수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유럽에선 이미 1970년대 버림받아
교회가 곧 기독교라는 생각이 위험하다고 했다. 기독교는 가족과 병원 같은 많은 공동체를 포함하고 있고, 대표적인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이다. 그는 김수환 추기경이 말한 “교회는 사회를 위해 있는 것이지, 사회가 교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바티칸 교황이 이런 생각을 하는 데는 1500년 걸렸다. 젊은 김수환 신부가 이런 생각을 했기에 비슷한 생각을 한 바오로 6세가 그를 추기경으로 발탁했다는 것이다.
“큰 교회가 성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교회는 참된 기독교 정신을 버렸다.” 그는 1972년에 세계일주 여행을 하면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이미 그때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버림받고 있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교회는 한때 700명까지 신도가 있던 대형교회였으나 당시 예배 보는 신도가 20명뿐이었다. 목사는 5명이나 됐는데 예배 보는 내내 목사들은 입구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다음주에 들른 영국 런던의 가장 오래된 큰 교회는 일주일 있다가 문을 닫는다고 했다. 천주교 성당도 마찬가지였다. 코펜하겐의 큰 성당은 문을 닫고 도서관과 주민센터로 변했다.” 그는 교회주의에 빠지면 기독교 정신이 버림을 받는다고 했다. 목사의 설교에는 교리와 교권은 있는데 인권은 없어서 지성인들이 교회를 외면한다고 했다. “큰 교회 목사들은 교회에 안 오면 죄인이라고 강조한다. 죄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다른 이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다. 목사들이 교회만 나오면 죄 사함을 받는다고 하고, 교회만 나오면 천당을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죄악이다”라고 했다.
그는 예수의 혁명가적 정신을 강조했다. “예수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도덕적인 인간의 의무를 다하도록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신앙적 은총을 내린다고 했다. 또 정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이는 복이 있으니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했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의 표현은 그 자체가 계명과 교리에 속박됐던 구약 전체에 대한 도전이자, 로마제국의 권력에 대한 항거적인 혁명정신”이라고 김 교수는 말한다. 한 사람의 통치자를 위해 모든 사람이 노예화되는 것을 정당시하던 당시 시대정신을 뒤엎는 소중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평신도이면서 권위 있는 성경학자이길 원하는 김 교수는 가난한 목수로 일하던 예수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인류를 구원하며 느껴야 했던 인간적 고뇌와 두려움을 성경 곳곳에서 느꼈다고 한다. 그런 예수이기에 평생 함께한다고 했다.
지팡이 보청기 틀니 없이 꼿꼿
그에겐 노인들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 지팡이나 보청기, 틀니가 없다. 50살 중반부터 혼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수영을 일주일에 세 번, 30분씩 한다. 그것이 그의 장수와 건강의 비결일까?
그는 나이를 먹어도 일을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한다. “건강을 잊었어요. 아마도 건강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일하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라며 “앞으로 1년은 더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기자는 대학 1학년 때 그의 ‘철학개론’ 강의를 들었다. 중간고사 문제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차이를 논하라”였다.(그때 그 과목을 C학점을 받아 장학금을 못 받았다) 점심 대접을 하고 싶었으나 약속이 있다고 했다. 그가 음식점에 작은 목소리로 전화를 해 예약을 부탁했다. “몇 분 오시냐?”는 질문에 그는 “한 명”이라고 답한다. 문득 그가 지난 세월 익숙해졌을 ‘인간적 고독’에 대해 떠올랐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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