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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대예배 목사님 말씀 동영상을 수록하여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말씀의 체험과 은혜를 한 주간도 듣고, 깨달으면서 성령의
함께하심을 한주간도 누리며,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말씀 동영상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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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이 공존한 두아디라교회 |
2007-03-05 16:4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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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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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과 악이 공존한 두아디라 교회
본문: 계2:18-29(신약 401쪽)
일시: 2007. 3. 4(주일 낮 예배), 삼일중앙교회, 9, 214, 313, 444(1), 204, 216, 98
계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 대로 갚아 주리라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두아디라는 버가모 동남쪽 60킬로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이곳은 헬무스와 카이쿠스 계곡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넓은 평야와 땅이 비옥하여 축산업이 발달하였으며, 소아시아의 수도인 버가모를 보호하기 위해 로마 군인들이 지키는 요새였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로 인해 번창한 상업도시가 되었으며, 당시 두아디라에는 없는 동업조합이 없을 정도로 각색 직종들의 조합이 있었는데 모직, 직조, 염색, 제혁, 도기, 구리, 등이었고 특히 자주색 염색천이 유명했습니다. 따라서 두아디라는 군사도시이자 상업도시였습니다.
각 조합마다 수호신이 있었는데 회원들은 자기가 가입한 조합의 신을 섬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의 제의는 잔치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수호신의 제사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곧 부도덕한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었고, 지금 말로 표현하면 생업에 종사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와 행음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 중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조합을 탈퇴한다면 일시에 직장과 사회적 지위를 잃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빈곤과 배고픔, 핍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합의 일원이 되어 문란한 행음의 잔치에 참여하고 우상에게 제물로 드렸던 음식을 먹는다면 이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형성은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는데, 첫째는 에베소에서 두란노 강론을 통해 제자를 양성하여 교회를 세웠을 가능성이고, 두 번째는 사도행전 16:14에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두아디라 교회는 염색 조합에 소속한 상인 루디아가 빌립보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귀향하여 설립한 교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1. 요한은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신약에 125회 나오는데 계시록에는 2:18에 단 한번 쓰여 있습니다. 이는 ‘아들로서의 신성과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묘사하는 말이다.
또한 “그 눈이 불꽃같고”는 계시록에 3번 쓰였습니다(1:14, 2:18, 19:12). 이 말의 뜻은 전지전능과 심판하는 의로운 눈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니엘 10:6에서는 그 눈이 햇불 같다고 했고, 히브리서 4:12-13에서는 불의한 것을 진노하는 눈으로 곧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불꽃: 단 7:9-10, 고전 3:12-13, 살후 1:7-9, 히 12:29, 벧후 3:7, 유 1:7)
‘빛난 주석’이란 용광로에서 펄펄 타서 빛나는 주석을 말합니다. 다니엘 10:6을 보면 비슷한 구절이 나오는데 다니엘에게 나타난 어떤 사람의 팔과 발이 빛난 놋과 같다고 했으며, 에스겔 1:6-7에서는 네 동물의 발바닥이 마광한 구리같이 빛났다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의 의미는 계시록 1:15에 예수님을 표현하기를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풀무에 연단한 빛난 주석 같은 발로라는 의미는 심판과 성결을 의미합니다.
2. 예수님께서 두아디라교회에 칭찬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19절입니다. “네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여기서 네사업과 네 나중 행위는 원문에서는 네 일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일들’이 있는 교회였고, 여러 가지 실천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교회는 첫사랑이 나중에는 없어졌지만 두아디라교회는 처음 행위들보다 나중 행위들이 더 많았던 교회입니다. 실천에 있어서 퇴보한 교회가 아니라, 발전한 교회였습니다. 다양한 실천의 성장과 성숙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19절에 기록된 주님의 칭찬 항목을 관찰하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사랑과 믿음은 실천의 동기이고 섬김과 인내는 실천의 표현입니다. 사랑에서 우러난 섬김이 있고, 믿음에서 생겨난 인내가 있습니다. 행위들이 있어도 사랑과 믿음의 동기가 아니라 과시와 자랑의 동기에 근거할 수도 있고, 행위들이 섬김과 인내로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교회의 행위들은 동기에 있어서나 표현에 있어서 주님이 칭찬할 만한 행위들이었습니다.
3. 그러나 두아디라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은 교회입니다.
1) 이세벨을 용납함
20절입니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것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발람은 초기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했고, 이세벨은 후기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했습니다.
구약의 이세벨은 시돈 왕 엣바알의 딸로서 이스라엘의 7대 왕 아합의 아내였고, 이스라엘 가운데 바알신을 들여와 바알의 사당과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숭배케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특히 그녀는 음행과 술수가 많았으며,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왕에게 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모든 선지자들을 죽이려했고 엘리야마저 죽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이세벨이 지금 두아디라교회에서 하나님의 종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습니다. 이세벨은 영적음란을 말하는 것으로 에베소 교회의 니골라당, 버가모 교회의 발람의 교훈과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4절의 ‘사단의 깊은 것’은 바로 이 이세벨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판 이세벨이라고 하면 곧 자신이 새 계시와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신자를 유혹하거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자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우상숭배와 음행을 저지르는 이단을 폭로해서 이겼지만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교회는 이런 이단을 용납함으로 주님 앞에서 심각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것을 보면 소아시아 교회들에 있어서 니골라당의 유혹은 찰거머리와 같이 달라붙어 피를 빠는 이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교회는 이런 이단 사상이 ‘자칭 선지자 여자 이세벨’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들이 더욱 쉽게 넘어간 것 같습니다. 꾀어서 음행을 하게 할 정도의 여인이라면 미인이었을 것입니다.
22절에 ‘그녀로 더불어 간음했다’ 는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세벨 자신이 자신의 미모로 하나님의 종들을 유혹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세벨은 미모인데다가 영적인 은사를 가진 사람으로 행세했습니다. ‘자칭 선지자’라는 구절을 보면 이세벨은 사이비 예언의 은사를 소유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그녀의 거짓된 영적인 권위와 은사와 유혹할 정도의 미모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들은 매혹적인 여인이 영적인 은사를 행사할 때 사람들은 저 여인이야말로 ‘하나님의 대변자’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 권위 있는 여인의 입으로 우상숭배와 음행은 괜찮다는 신탁 즉 신의 허락이 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바로 이런 식이었습니다.
이것을 두아디라의 생활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는 각종 사업 조합이 있었고 각 조합마다 수호신이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계 모임 같은 곳에 가면 으레 수호신에게 제사하는 순서가 있는데, 그 제사에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음행의 순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각 조합에 소속되지 않으면 생업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우상숭배와 행음에 대한 사회적인 요구와 압력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두아디라교회의 신자들은 요즈음 직장 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신앙인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직장에서 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겪는 고통과 갈등을 매일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두아디라교회신자들은 사회의 요구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갈등을 겪었습니다. 사회적인 요구대로 살지 않으면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치게 될 것이라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요구에 따르면 주님의 말씀에 어긋나므로 양심의 가책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세벨이라는 미모의 여성 ‘선지자’가 예언까지 하면서 ‘여러분이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는 한 그러한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만 나오면 세상 안에서 세상에 속해 있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길입니다’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새 신자를 얻고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는 이론을 예언이라는 영적인 권위로 뒷받침해 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그런 모본을 보여줌으로, 이런 문제로 갈등하고 있는 교인들에게는 참으로 귀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동안 가책과 고민의 쇠고랑을 차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여선지자가 그 쇠고랑으로부터 풀어주니 얼마나 후련했겠습니까? (로마 카톨릭의 신부의 음주, 흡연, 제사문제)
그러나 이것은 바로 영적인 낭떠러지 상태입니다. 세상이라는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않으면서 거기에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는가 하는 게임입니다. 즉 죄의 불에 그을지 않으면서 그 불에 얼마나 가까이 갈 수 있나 하는 것입니다.
이세벨은 사회적인 행동인 우상숭배와 행음에 동참하면서 생각과 말만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으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행동으로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아름다운 논리로 포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주님을 자명하게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두아디라교회에는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간 자들도 있었지만, 그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24절입니다. 신실한 자들에게는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그들은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아는 것’은 이세벨의 유혹대로 세상과 타협하는 행위들을 실제로 해 보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2:10에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 나오는데, 구원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깊은 것은 멸망과 관계된 것입니다. 죄악의 깊은 것을 말합니다. ‘
소위’라는 말은 이세벨과 그녀의 추종자들이 말하는 사단의 깊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은혜의 깊은 것을 알기 위해서는 죄악의 깊이를 실제적으로 체험해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세속적인 죄악을 정당화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한 가지 잘못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 가야한다’는 말이 호랑이를 잡는 작전이지 먹히는 작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를 지어 봐야 한다는 것은 사단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셨지만, 평생 죄를 지으신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이 다양한 유혹을 받으셨지만, 무죄하신 분이고, 의를 완성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깊은 죄악의 맛을 알아야 한다’는 이론은 달콤한 독약입니다.
이세벨이 두아디라교회에 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교회의 영적인 분위기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었고, 교회의 분위기가 더 밝아진 것 같은데, 경건은 줄어들었습니다. 세상과는 가까워지고, 세상에서 살기는 더 편해졌는데, 하나님으로부터는 멀리 떠나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직장에서 ‘뭐 별나게 믿는다고 안마시고 안하나? 사람들이 하는 대로 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고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게 해준다. 세상과 어울리는 것이 성숙이다’라고 외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죄악에 대해서 ‘NO’하며 사는 것을 은혜의 자유가 아니라 율법의 굴레라고 하면서, 직장에서 분위기에 맞추어 즐기며 살도록 권면하기도 합니다. 거기에는 영적인 권위와 보장이 따르는 달콤한 매력이 있습니다.
이세벨은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구약시대 이세벨은 악하고, 아합은 약했습니다. 일부 교인들이 악하지는 않아도, 약해서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세벨을 용납하고 악행에 가담하되 교묘한 자기 정당화의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세벨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형벌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21절입니다.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주님은 이세벨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회개치 않기 때문에 형벌을 내리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22-23절입니다. 이세벨의 침상은 본래 죄악을 즐기는 침상이었으나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바로 그 침상에 그녀를 던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세벨의 침상은 곧 이세벨의 교훈과 꾀임에 빠져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하다가 병든 자 특히 성병이나 에이츠 등으로 죽게 되는 침상을 말합니다. 그녀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에 던지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이세벨이 끝내 회개치 않으면 그녀의 자녀들을 사망으로 치시겠다는 경고도 덧 붙이셨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징벌을 경고하신 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이 없는 행복은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히12: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본문에서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볼 수 있다. 이세벨처럼 교묘한 죄인의 경우 그냥 치리하셔야 할 것 같은데, 그녀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면 용서하시겠다는 것이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요일1:9-10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않았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렇게 자비하신 주님이지만,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님은 그들을 반드시 징계하십니다. 회개의 기회는 모래시계와 같습니다. 모래가 다 흘러가면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집은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벧전4:17-18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4. 주님은 이세벨과 그 추종자들에게 형벌을 경고하는 한편 그 죄악에 동침하지 않은 자들에게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24-27절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지금까지 지켜오던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세벨의 유혹은 한번 오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되는 것이기 때문에 유혹을 한번 이겼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이겨야합니다.
이세벨의 유혹을 따라가느냐, 안 따라가느냐 하는 것은 결국 주님의 주권을 부인하느냐? 인정하느냐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붙어있는 한 여호와냐? 바알이냐? 주님이야? 나의 쾌락이냐?의 싸움은 계속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님은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통치권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은 징벌과 상급을 약속하면서 자신이 어떠한 분이심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23절입니다.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 인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십니다.
마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고후 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결 론 :
우리는 두아디라교회처럼 사랑과 믿음의 동기에서 봉사와 인내를 실천하는 행위들이 있어야합니다. 처음보다 나중에 더 많아져야합니다. 이런 실천 행위 가운데 이세벨의 유혹을 경계해야합니다. 동기와 행위대로 갚으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적 용)
1. 내 삶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봉사와 인내의 실천적인 삶은 있는가?
2. 내가 처음 믿을 때보다 지금이 더 성숙하고 견고한가?
3. 하나님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 가운데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4. 직장이나 삶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지켜지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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